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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개발하고 싶은 걸까? 2 본문

Idea/무엇을 개발할까?

나는 무엇을 개발하고 싶은 걸까? 2

orthanc 2021. 4. 9. 14:01

꼰러닝. 

딥러닝을 꼬아서 보는,  

꼰대의 시각으로 보는 딥러닝이랄까.

오전 노드를 끝내고 점심을 먹다가 문득 떠오른 이름이다.

이런 이름이 떠오르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밥에 카레를 비벼 먹고 있는데
최신 삼성 스마트폰의 사진 어플에서 개체를 지우는 기능이 불현듯 생각났다.
(딥러닝으로의 neuroplasticity이 이제 슬슬 돌아가는 모양이다)

처음 그 기능에 대해 들었을 땐 편리하고 유용하겠다 싶었는데
카레가 너무 매워서 그랬는지 이런 물음표가 점점 커져갔다.
"이거 너무 잔인한 기능인데?"

잔인하다는 표현을 너무 오랜만에 써서 그런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감정이 제대로 담겨 있는 건지 가물가물했다.
곧바로 사전을 찾아봤다.

'잔인하다
형용사, 인정이 없고 아주 모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에서 개체를 지운다는 건 인정이 없고 아주 모진 짓이란 생각
아 매우 적확한 단어였다.

가끔 해가 지는 하늘 쪽으로 종로거리를 쏘다니다 보면
'하 저놈의 빌딩들 싹 다 밀어 버리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동서고래 모든 시인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묘사하고자 했을 법한 
top scenery 베스트 5에 
해질 무렵 풍경은 분명 들어갈 것이다.

그 아름다운 하늘을 싹둑싹둑 잘라 먹거나
듬성듬성 쪼개 놓는 빌딩들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마다
제일 멋진 노을은 교보생명 빌딩이 가리고 있고
분홍색과 연보랏빛으로 물든 제일 환상적인 구름은 미래에셋증권 빌딩이 가리고 있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지는 해를 떠나 보내고
밤이 어둑어둑 해지길 반복해
하루 이틀 며칠이 흘러
하늘이 흐린 날들이 계속 되면,
그 아름다웠던 석양을 봤던 날이 자연스레 떠오르고는 
이렇게 속으로 되뇌이곤 했다.
'하.. 그날 같이 완벽한 하늘은 당분간 오지 않겠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날의 아쉬움은 빌딩숲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무질서하게 솟아오른 빌딩들 '덕분에'
그 아름다웠던 하늘이 더 아쉬웠던 거고
그래서 더 소중해진 것이다.

탁 트인 하늘을 만끽하고 싶으면 
제주도 어느 오름에 올라가면 될 것이다.

서울의 빌딩숲에는 나름의 풍경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자연의 광대함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소중히 여기게끔 만들어 준다.

심지어 교보생명 빌딩은 내가 종로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인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있는 건물이다.
미래에셋증권 건물은 주말 종로 중심에 그만한 가격으로 주차해놓고 놀러 다니기 편한 데가 또 없는 곳이다. 

이런 빌딩들을 싹 밀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뭐 들 수는 있지만
그 마음이 진심이었고
실현가능하기까지 하다면
다소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까.

사진에서 개체를 지울 수 있는 기능도
같은 맥락에 있는 이야기로 보인다.

물론 그 기능이 얼마나 필요로한 기능이었는지는 나 역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사진을 찍을 때
배경에 남지 않게 그들이 떠날 때까지 오랜 시간 기다려도 보고
다른 장소로 여기저기 옮겨다녀도 보았기에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정말 운좋게 사람이 없을 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거나
사진에 남기고 싶지 않은 피사체를 어떻게든 프레임 밖에 놓이게 하기 위해
몸과 머리를 굴려야 했던 시도들이,
나아가 그런 운이나 노력을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 지를
몇 번의 터치로 생각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잔인하다.

그런 기능을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계속 사용한다는 건
분명 어떤 식으로든 몰인간으로의 neuroplasticity을 가속화 시킬 것만 같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든다.

내가 너무 꼬아 보는 것일까?
아니면 아날로그 감성이 지나친 나머지 꼰대 감성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기술의 의미는 사용자가 만들고
사용자가 부여하는 것이다.

기술의 창안자는 구현해낼 뿐이다.

애초에 기술자에게 저런 관점이 도사리고 있었다면
그런 기능을 스마트폰에 탑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해도 결코 구현해낼 수 없었을 테니까.

나는 사진 어플에서 개체를 지울 수 있는 기능이
'과연 좋기만 한가?' 를 묻고 싶은 것이다.

아마 세그멘테이션 기술과 이미지 생성, 합성 기술이 더 발달하면 
정말 감쪽같이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존재가 그와 동등한 존재에 의해 지워지는 일이
사실 새로운 게 아니고 
그렇게 잔인한 일도 아니라는 반론에 열려 있다.

꼴도 보기 싫은 전여친과 함께 찍힌 사진에서
내가 너무 잘나와 버리기 아까워 
전여친이 나온 부분을 잘라내는 일 따위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진 어플에서 원하는 피사체를 몇번의 터치로 간편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지울 수 있다는 건
조금 차원이 다르다.

너무 쉽게, 그리고 아주 완벽하게, 무엇보다 별다른 감정의 소용돌이나 사고의 비판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게다가 수없이 많이 지울 수 있게 된다는 건
분명히 '다르다'.

(이쯤 되니 카레는 다 먹은지 오래고 
소화도 다 됐을 법 하여
쓰던 글을 임시저장해 놓고
밖에서 산책을 하며 남은 부분을 쓰기로 했다)

나는 이미지 만큼이나 
텍스트에서도 위와 유사한 또는 더 파괴적인 기능이 우리의 몰인간화 촉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지금 쓰이고 있는 '이 글'이 '내'가 아니라 어떤 인공지능 언어모델이 쓰고 있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텍스트가 이미지보다 무서운 것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채널이라는 점이다.

몇 장의 사진으로 어떤 인간의 인생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몇 줄의 글로 한 인간의 인생이 바뀌는 일은 가능하니까.

어떤 글이 인간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 아니면 컴퓨터 모델이 쓴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미지 인식 분야에서는 이런 분별기술이 있는 걸로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나는데
튜링머신을 통과한 컴퓨터 작문을
인간이 컴퓨터가 썼다고 추론해낼 만한 방법은 
지금으로선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표현력을 가진 기술이
무비판적으로 상용화되어선 안될 것이다. 

대중에게 널리 쓰여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 기술에 대해 아무런 비판없이 개선과 응용에만 천착해서도 안될 것이다.

몇 주전 2차 해커톤 주제를 생각하면서
과연 내가 딥러닝을 공부해서 결국 무엇을 만들고 싶은 것인가 라는 질문을
수차례 자문해보게 되었다.

아직은 막연하지만
자연어와 음성 처리 분야로 진로를 확실히 정해놓은 데서
나아가 무엇을 개발하고 싶은 지에 대해
이전보다는 조금 뚜렷한 윤곽이 그려진 것 같다.

딥러닝 기술을 통해 인건비를 낮추고 상상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는 일도 매력적이지만
내가 구현하고 싶은 건
인간성을 높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함양시킬 수 있는 상품 쪽인 것 같다.

말이 너무 길었다.
다시 코딩하러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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