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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a/급진적인 혹은 극단적인

불친절 연쇄

orthanc 2021. 5. 4. 16:54

 A/S기사 - 전화상담원 - 판매부서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했을 때 직접적으로 연락이 가능한 데는 저 세 곳이다.

주로 상담원을 통해 기사나 판매담당자와 연락이 되고
그 윗선은 상담원 또는 인터넷 홈페이지나 직통번호로 연결될 수 있다.

대개 윗선에 있는 사람들은 일단 말을 잘한다.
기업규모가 클수록 합리적으로 말하는 편이며 그만큼 시시비비와 책임소재를 최대한 명확히 가려주려고 한다.
(소비자가 그런 대답을 얻어낼 수 있을 만큼 부당한 상황을 겪었고 그 이유를 아주 잘 소명해낸다는 전제 하에)

윗선까지 연락이 닿을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상담원 선에서 막히거나(규모가 작은 회사이거나 임직원 자체가 글러먹은 경우)
상담원이 전달해도 윗선 자체에서 씹는 게 다반사다.

결국 소비자는
상담원과 A/S기사, 그리고 판매담당 직원과 3:1로 싸우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는데
운이 좋아야 하루 안에 셋 모두에게 돌아가며 연락을 받거나 다시 할 수 있고
재수가 없으면 문제가 있는 제품을 어떻게든 혼자서 해보려 낑낑대다가 그날을 잡쳐버리기 일쑤다.

가령 욕실 새면대 수전에서 물이 나오는 토수구에 조립되는 정류망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보자.
혹은 초고속 유선인터넷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끊기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물과 전기는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아주 시급한 문제이므로
해당 업체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기 전에 일어날 대로 일어난 성과 흥분을 잘 삭혀야한다.
물론 그 사이에 유튜브와 블로그를 뒤질대로 뒤져서 
반전문가가 되어 있는 상태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글의 주제인 '불친절'에 대해 얘기해보자.

많은 도시인들에게 고객센터에 전화를 해본 경험을 물어봤을 때
상담원에서부터 불친절을 느꼈다는 답을 듣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상담원은 말 그대로 교환원에 지나지 않아서
소비자의 말을 최대한 그대로 받아 관련 부서에 전달하는 일을 전담할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먼저 짚어둘 것은
상담원이 연결해준 A/S기사나 판매부서 직원들 사이를 한번이라도 왔다갔다 한 소비자라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문제에 대한 명확한 설명 내지 해답을 듣지 못한 상태라면)
결국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다시 누를 수밖에 없고
그동안 쌓인 모든 분노와 울분을 상담원에게 쏟기 십상이란 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99%의 상담원은 잔뜩 화가 난 소비자의 지랄을 들어주고 그에 대해 사과할 이유가 없다.

판매부서와 A/S기사의 경우
일단 모든 시장조사를 끝내고, 각종 대안들을 긁어 모을대로 모아 두서없이 내뱉어 대는
소비자와 연결되어 얘기를 몇마디 나누는 순간
자신들이 재직하고 있는 회사의 열악한 복지와 노동환경, 급여조건들이
초당 수백프레임의 속도로 머릿속에 영사되기 시작하면서
본인들에게도 슬슬 시동이 걸려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부아가 치밀어 그냥 성질만 부리는 소비자라면 차라리 쉬울 수도 있지만
아주 집요하고 치밀하며 조리있는 소비자가
이런 저런 근거를 들며 이런 저런 요구사항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가뜩이나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오늘만큼은 이런 전화를 정말 붙잡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당신이 나를 지금 아주아주 귀찮고 아주아주 성가시게 하고 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담아낸 말투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갈등이 그러하듯
아주 간단하고 일사천리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누구 때문에 먼저 시작됐는지 모를 저 말투 때문에
쓸데없이 커져버린다.

그런데 이성을 되찾고 가만히 살펴보면
현장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인터넷 잡학으로 무장한 소비자를 가소롭게 여기는 A/S기사의 비아냥이나
소비자가 원하는대로 깎아줄 수도 없고, 더 비싸게 판다고 인센티브가 오는 것도 아닌 판매부서 직원의 짜증 모두
그들 개인의 인격이나 소비자의 액션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고용주, 임원들의
방만, 무책임, 몰상식, 비인격, 몰염치, 비열함, 착취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소비자가 아무리 친절하게 시작해도
엿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직원이라면
그들의 불친절을 그들만의 잘못으로 돌릴 순 없다.

하지만 이런 구조적인 문제의식을
돌려막기 당한 소비자나 돌려 막을수밖에 없는 실무자에게  
그 순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핍되고 곤란한 처지에 나오는 친절이야 말로 진정한 친절이라 할 수 있으나
우리들 대부분은 현자도 아니고 군자도 아니다.

여유와 친절을 개인의 인격에 기대하는 건 불안 요소가 너무 많다.

친절한 서비스나 고객만족이란 단어를
그날의 분위기나 그 사람의 지금 기분 같은 우연적 요소에 거는 회사의 말로는 정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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